내 주전공 시대는 청동기시대~초기 철기시대이지만, 문화의 연속성 외에도 청동기~초기 철기시대 유적이 있는 곳 또는 그 가까이에 고구려 왕성, 산성, 고분, 취락 등이 산재하고 있기에 이른 시기부터 많은 고구려 유적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상징적인 사례를 들면, 길림시 용담산성과 그 주변을 들 수 있는데, 용담산성은 고구려 산성이지만, 그와 함께 청동기시대 서단산문화의 소규모 취락이 형성되어 있던 곳이자, 부여문화(포자연문화)의 유적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1990년대부터 중국 동북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지석묘, 서황산식 대석개묘, 석관묘, 목관곽묘 등 고분을 거의 대부분 유적을 직접 확인하였는데, 당시로서는 직접 현장을 찾아 무덤의 기본 사항(위치, 입지, 규모, 방향, 주변 유적군과의 관계 등)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한 두줄 또는 모호한 보고문만을 갖고는 무덤의 정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상에 최소한 상석이라도 노출되어 있어 간단한 현장 조사를 통해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지석묘를 중심으로 하여 청동기시대의 많은 무덤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 당시로서는 미보고되거나 간략한 정보만이 알려져 있던 고구려 초기 적석묘를 다수 조사하게 되었다.
이 글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출판된 “삼국시대 국가의 성장과 물질문화 I”에 실은 논문인데, 위와 같은 현장 조사 경험을 체계화한 것이다. 고구려 초기 적석묘의 형성 과정을 그 직전의 ‘대전자형 대석개묘’(내가 처음으로 개념화하여 명명한 학술 개념이다)부터의 기술 혁신과 정치사회적 맥락의 물질적 투사에서 찾아 모식화하였는데,
최근 보고된 환인만족자치현 풍가보자 적석묘, 망강루 적석묘, 특히 망강루 적석묘의 경우 매장주체부를 그 이전 환인만족자치현 일대의 토착 묘제인 대전자 대석개묘와 유사하게 암광을 일부 굴착하여 조성하여 놓고 적석부가 그 이후의 초기 고구려 적석묘와는 달리 마치 묘역식지석묘의 적석묘역과 유사하는 등, 적석묘의 초현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나의 이 때의 분석은 나중에 고구려 초기 적석묘의 형성과정과 출현이라는 단독 논문으로 발전되었다. 망강루 적석묘 등 매장주체부의 조성에 대한 나의 분석에 대해 중국측에서 발굴을 잘못해서 무덤 바닥을 파들어간 때문으로 보는 의견도 있는데,
이는 현장 경험이 부족하고 글로 다 드러나지 않는 이런 저런 조사과정을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탁상의 분석일 따름이다. 페북 글에서 다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삼국시대는 문명이 완성된 시기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특히 고구려, 백제, 신라가 요동과 한반도의 여러 소국 가운데 하나로서 경쟁을 하던 시기는 초기국가가 형성되던 시점으로서, 이 시기는 그 이전의 사회와는 정치, 경제, 사회, 나아가 이념적인 측면에서도 질적으로 다른 사회문화체계를 구성한 시기이다.
이러한 사회문화적인 변동은 당연히 물질문화에서도 중대한 변동으로 발현되었다. 이 시기의 물질문화 변동은 삼국시대 전성기의 고총 고분, 도성, 산성 등의 복합적인 물질문화 체계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삼국시대 초기부터 개시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문명의 성숙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삼국시대에 정형화된 물질문화 체계는 근세까지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적 경관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한국적 전통의 확립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문화의 변동은 주변 지역, 주변 문화와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관계 속에서 지역적 맥락을 이루며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삼국시대 초기 사회를 이끌어가던 수장층과 집단의 새로운 기술문화에 대한 적응과 선택 및 조절에 의해 지역화되었고, 그러한 현상을 물질적인 차원에서 보면 기술 혁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 의식을 배경으로 삼국시대 초기의 여러 소국 가운데 선고구려~고구려 초기의 고분 구조와 장제(장법)의 변동과 변동되어가는 과정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 본 것이다.
고구려 초기의 물질문화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을 들라면 모든 연구자가 적석묘를 들 것이다.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는 삼국시대의 고분문화가 고총화되던 시기 백제, 신라, 가야, 영산강 유역 등과는 달리 석분을 철저하게 고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강한 지역성을 띄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 초기의 주요한 물질문화는 고구려 건국 직전의 물질문화와 별다른 차별성이 없다. 이렇게 볼 때, 주몽집단이 고구려를 건국한 기원전 37년은 역사적, 정치적인 상징적 사건일 뿐, 물질문화에서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볼 수 없다.
이 글은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고구려 건국 전 선고구려기부터 어떠한 시기에 어떠한 과정과 맥락을 갖고 이 일대의 묘제와 장제가 변동되었는지, 변동되었다면 이러한 변동이 이 일대의 기술 환경의 변화와 어떠한 연관을 갖고 있고, 또 선행 묘제와 내적으로 어떠한 상관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아래는 이 글의 간략한 요지이다.
고구려의 물질문화는 적석총과 부장 유물 및 륜제의 본격적인 도입, 시유 기법의 채용, 소성 기술의 혁신 등을 고려할 때 3세기 말~4세기 초가 커다란 하나의 획기를 이루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이를 고구려 중기의 시작으로 보았다.
따라서 고구려 건국 이후 중기의 개시 시점까지를 하나의 시간 단위로 묶을 수 있는데, 이 시간 범위는 방형과 장방형으로 정형화된 기단식 석곽적석묘의 유행, 민고리 철제 환수도 등 신기종 무기류의 유행, 토기에서 마광 기법의 증가 등을 기준으로 기원전 37년~기원전후를 초기, 기원후 1~3세기를 전기로 분류할 수 있다.
환인 일대의 물질문화는 기원전 37년 전후를 기점으로 획기적으로 변동된 현상이 관측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고구려 초기 적석묘와 각종의 조질무문토기 등이 그 이전 시기에도 이 일대 물질문화의 중요한 구성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고구려 초기의 물질문화와 직접적인 연계성을 보이고 있는 기원전 2~1세기 중반을 선고구려기로 범주화할 수 있다. 그런데 기원전 2~1세기 중반의 물질문화는 적석묘를 제외한 나머지에서 앞선 기원전 4~3세기의 물질문화와 깊은 연관성을 보이고 있다.
이 글에서는 편의를 위해 후자를 선고구려 I기, 전자를 선고구려 II기로 잠정 획기하였다.
환인 일대의 물질문화는 선고구려 I기에 급격히 변동되는데, 이러한 변동은 종래의 석기 절대 중심의 사회가 청동기 중심의 사회로 전환된 것에서 잘 드러난다. 결국 이 시기의 변동은 주변 지역과의 교류를 통한 기술 혁신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발생한 변동 가운데 청동기만큼이나 주목되는 것이 바로 묘제(대석개묘)와 장법(다인 화장)의 전환이다. 이러한 변모는 환인 일대의 수장층이 혼강 상류의 통화지역 등과의 교류를 통해 청동기와 함께 길림 남부의 묘제와 장법인 대석개묘와 다인 화장을 수용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선고구려 I기에 확립된 환인 일대의 묘제는 선고구려 I기 말~선고구려 II기 초에 적석묘로 전환된다. 물론 이 시기에 환인 일대의 물질문화 또한 환호취락과 온돌 주거지의 등장, 철기의 광범위한 확산, 신기종 토기의 출현 등에서 상징되듯이 커다란 변동을 이룬다.
이 시기의 변동은, 선고구려 I기의 변동이 수장층을 중심으로 한 청동기(동검, 동모, 동경)의 제작과 소유에 국한되어 있어 사회경제 전반적으로는 제한적이었던 반면, 농공구를 중심으로 한 강철 제품의 광범위한 보급과 환호 취락의 등장에서 상징되듯이 수장층을 정점으로 한 사회경제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이러한 기술적 혁신과 사회경제 전반의 분위기 변화는 수장층의 정치권력의 성장으로 귀결되었는데, 이의 물질적 발현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무기단식 적석묘의 출현이다. 고구려 초기 적석묘는 유적마다의 지형지질적인 조건과 대형 개석 하중의 분산 등을 목적으로 선고구려 I기 대석개묘에 부석 시설이 부가된 것을 그 기원으로 하고 있는데,
선고구려 I기 말~II기 초에는 부석이 강화되고 개석이 소형화 또는 생략되면서 무기단식 적석묘가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적석묘는 매장주체부가 암반을 굴착한 반지하식 구조라는 점에서 대석개묘적 전통이 잔존하고 있었다.
환인 일대의 물질문화는 선고구려 II기 후반 다시 한 번 변동하게 되는데, 이는 철기문화의 상대적인 성숙과 연관이 있다. 이 시기의 적석묘는 매장주체부가 대부분 지상 적석부 위로 올라간다든지, 보다 고대화된 적석부의 유실을 막기 위한 보완 시설이 구조화된다든지 하는 점에서 이전 단계의 무기단식 적석묘와 근본적인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이 시기 적석묘의 구조적 개선은 결국 곧 이은 시기 계장적석총과 기단식 적석총으로 이어진다. 한편 장법은 화장이 그대로 지속되었지만, 수장층의 정치권력 강화에 비례하여 매장 인수가 개인 또는 부부 중심으로 줄어드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