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청동기시대의 청동기 유물군 가운데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청동도자이다. 청동도자는 동검이 출현하기 훨씬 전인 전기 청동기부터 확인된다.
물론 이와 같은 양상은 분석 대상을 한반도로만 국한하였을 때 큰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한반도에서는 청동기시대 내내 청동도자가 거의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분석 대상을 요령과 길림 지역으로 조금 확대하면, 이 일대에서 청동도자가 중요한 청동기로 오랫동안 사용되었음이 드러난다. 특히 십이대영자문화의 발상지이자 주요 중심 분포권인 요서 지역과 서단산문화의 분포권인 길림성 중부가 그러하다.
내가 청동도자에 특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내몽고자치구, 섬서성, 산서성, 하북성의 청동기를 관찰하고 유물유적노트에 관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어느 지역, 어느 유적이든 간에 동검은 없어도 반드시 청동도자는 있고, 매우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것들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병부와 신부의 구조와 형태, 크기, 인부의 사용흔, 장식성 등을 고려할 때, 어떤 것은 실생활용이 아닌 의기였고, 부장용이었으며, 매납용이었고, 또 어떤 것들은 형태와 인부의 명확한 사용흔 및 재가공흔으로 인해 실생활용이었다.
그런데 청동도자는 의외로 크기와 형태가 다양하여 실생활용이라 할지라도 각각의 세부 형태와 크기, 신부의 면적, 인부의 호곡도 등이 달라 세부적인 용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 금새 눈에 띠었다.
이후 가정과 시장에서 식자재를 가공, 요리할 때 사용하는 다양한 용도의 칼을 관찰하게 되었고, 각각의 쓰임새에 따라 크기와 형태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유물에 대한 경험과 관찰을 통해, 언젠가는 동북아 청동도자의 기능과 형태의 상관성을 밝히고자 하였는데, 이 논문은 그러한 학문적 배경의 초기에 기초적인 현상만이라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작성되어진 것이다.
아쉬운 것은 이 기초연구 이후 보다 진전된 상위의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어릴 적부터 품고 있었으나 아직 채 풀지 못한 의문점이 어느 정도 풀어질 것이고, 그 때 완성짓지 못한 후속 연구를 진행할 것을 스스로 약속해 본다.
내가 처음 청동도자 연구를 진행하고자 할 때, 요령과 길림 지역만을 대상으로 하기에는 관련 연구가 없었다. 청동도자가 한반도를 기준으로 할 때는 거의 없었던데다 동검, 동경 등에 비해 중요도가 낮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여서 이 지역만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없었다. 다만 요령과 길림 지역의 청동도자가 장성 연선을 중심으로 하는 북중국의 청동도자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었기에 이 지역을 대상으로 한 초기의 연구가 참고할만하였다.
당시 북중국 전반의 청동도자와 관련한 형식학적 연구 또는 분석으로는 江上波夫(1935), 李濟(1949), 陳蒙家(1954), 陳振中(1985)의 연구가 있었다.
江上波夫는 청동도자를 처음으로 형식분류하였다는 점에서 학사적인 의의가 있는데, 주로 내몽고 중부를 중심으로 한 장성 일대의 구매품과 전세품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병부의 단면을 제1기준으로 하여, 납작편평한 것과 양 측변에 돌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대분한 뒤, 이를 다시 병부의 장착 방식, 병두부의 형태, 병부의 장식문양, 병부와 인부의 연결 상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도합 11개 형식으로 세분하였다.
江上波夫의 분류는 관련 연구의 단초를 열었다는 점 뿐만 아니라 기준으로 삼을만한 속성을 대부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그러나 문제점 또한 적지 않은데, 가장 큰 문제는 과연 병부의 단면이 청동도자를 대분류하는 최적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의 분류의 문제점은 그의 A형과 F형 가운데 일부 표본(鹿首, 曲柄, 弧背凹刃)이 병부 단면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완전히 동일한 속성을 보이고 있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청동도자를 병부의 단면이 아닌 다른 속성을 기준으로 대분류할 필요성이 있었다.
李濟는 殷墟에서 출토된 유물만을 특화하여 분류하였는데, 江上波夫와는 달리 인부 형태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殷墟의 청동도자를 弧背凹刃, 凹背弧刃, 直背弧刃, 橫S자形의 4개형(A, B, C, D)으로 대분류한 뒤, 이를 다시 인부의 세부 형태 차이에 따라 도합 40개식(A1, A2, B1, B2, C1, C2, D1, D2…)으로 세분하였다.
그의 분류는 기준의 적용이 일관되어 있다는 점 뿐만 아니라, 유물의 공반 관계와 형태적 속성의 상관 관계를 고려하여 각 형식의 변천 관계를 살펴 보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江上波夫 보다 한 단계 진전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李濟의 분류는 지나치게 세분되어 있어 사실상 분류를 위한 분류에 그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예를들어, A형의 경우 도합 13개 형식으로 세분하고 있는데, 인부 끝부위의 미세한 변화까지를 모두 고려하고 있어 분류된 형식이 형식이라기 보다는 유물 각각의 차이를 기호화한 인상을 줄 정도였다.
陳蒙家의 분류는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제시된 것인데, 殷墟의 청동도자를 인부 형태를 제1기준으로 하여 전체 4개형으로 단순화한 뒤, 병두부 장식의 유무를 제2기준으로 하여 6개식으로, 병두부 장식의 세부적인 형태 차이 등을 제3기준으로 하여 21개 아식으로 세분하였다.
이제와 진몽가의 분류안은 인부를 제1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런데 인부 형태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잡을 경우, 기원전 12~11세기 장성 연선에서 시대성을 띄며 특징적으로 유행한 獸首銅刀와 기원전 6~5세기 북중국 일대의 環首銅刀가 같은 형식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에 반해 陳振中은 청동도자의 여러 속성 가운데 병두부를 포함한 병부가 가장 유효한 분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이에 따라 중국 내지와 북중국의 유물군을 전체 11개형으로 대분류하였는데, 이렇게 분류할 경우 기존의 모든 청동도자를 시공간성을 반영하는 몇 개의 부류로 일목요연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당시까지 제시되어 있던 분류안 가운데 진진중의 분류안을 가장 타당하다고 보았다. 부연하면, 인부만을 기준으로 분류할 경우(弧背凹刃刀…), 인부를 제외한 일체의 속성(着柄方式, 柄部 形態 등)이 배제되게 된다. 반면 병부를 기준으로 대분류할 경우(鈴首銅刀, 獸首銅刀, 齒柄銅刀, 曲柄銅刀, 直柄銅刀…) 그 자체만으로도 청동도자의 시간성, 문화 관계, 계열적인 관계 등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진진중의 분류가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의 유물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기에 구체적인 분류에서 빠진 것들고 있고, 또 하위 분류에 반영되어 있지 않은 것들도 있기에 해당 지역의 유물 전체가 포괄될 수 있는 새로운 분류안이 제시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연구에서는 요령과 길림 지역의 청동도자를 병부를 제1기준으로 하여, 병부 아래에 鈕가 달려 있는 鈕柄銅刀(A형), 병부가 현재의 食刀柄과 유사한 食刀柄銅刀(B형), 병두부에 匙形裝飾物이 있는 匙柄銅刀(C형), 병두부에 짐승모양의 장식이 있는 獸柄銅刀(D형), 병부 아래에 치상돌기가 있는 齒柄銅刀(E형), 병부에 장타원형 구멍이 뚫어져 있는 釘孔柄銅刀(F형), 병부 끝에 작은 원형상의 구멍이 뚫어져 있는 穿孔柄銅刀(G형), 병두부에 환수가 있는 環首銅刀(H형), 병두부 내측에 요대 착장 등을 위한 걸이(鉤)가 있는 鉤柄銅刀(I형), 병두부에 방울이 달려 있는 鈴首銅刀(J형)으로 대분류하였다.
아울러 대분류된 동형 내에서 변이폭이 큰 복수의 유물군이 있는 경우, 이를 세부 형식으로 세분류하였다. 穿孔柄銅刀는 인부와 병부 모두 세장한 十二臺營子類(GII식)와 그렇지 않은 기타류(GI식)로,
獸柄銅刀는 병두부의 동물장식이 전신으로 되어 있는지 아니면 동물머리만으로 제한되어 있는지를 기준으로 사슴이나 소의 머리만이 장식되어 있는 류(DI식)(彎柳街, 水泉城子M741…)와 늑대나 토끼 등의 전신이 장식되어 있는 류(DII식)(십이대영자 M1)로,
齒柄銅刀는 병부가 인부와 단을 지어 구분되어 있는가 등을 기준으로 병부가 단을 지어 구분되어 있으면서 치상돌기가 발달되어 있지 않은 류를 EI식(平頂山3期層…), 병부가 구분되어 있으면서 치상돌기가 발달되어 있는 류를 EII식(和尙溝M17…), 병부가 인부와 구분되어 있지 않은 류를 EIII식(猴石山M18…)으로,
環首銅刀는 병부와 인부 사이에 欄이 형성되어 있으면서 환수 외면에 돌기가 장식되어 있는 것 (HI식)(楊河…), 병부와 인부가 밋밋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병두부에 소형의 환수가 달려 있는 것(HII식)(老建平…), 도신 전반이 세장한 가운데 병부가 인부와 단을 지어 구분되어 있고 병부 끝에 대형의 환수가 달려 있는 것(HIII식)(南洞溝…)으로 각각 세분류하였다.
아래는 이 논문의 요지이다.
청동기시대 요령~길림지역의 청동도자는 병부 형태를 제1기준으로 할 때, 鈕柄銅刀(A형), 食刀柄銅刀(B형), 匙柄銅刀(C형), 獸柄銅刀(D형), 齒柄銅刀(E형), 釘孔柄銅刀(F형), 穿孔柄銅刀(G형), 環首銅刀(H형), 鉤柄銅刀(I형), 鈴首銅刀(J형)의 10개형으로 대분류되는데, 이 가운데 다른 형에 비해 존속 기간이 길거나 속성의 폭이 넓은 獸柄銅刀, 齒柄銅刀, 穿孔柄銅刀, 環首銅刀는 병부와 병두부의 세부 차이에 따라 2~3개 형식으로 세분된다.
요령~길림지역 청동도자는 기술적인 혁신과 시대성을 강하게 띄고 있는 유물의 조합을 기준으로 할 때 전체 5개의 공반단계로 획기된다.
제I단계는 위영자유형과 고대산문화의 유물군과 고식의 청동손칼(DI, EI, G, HI, J)이 공반하는 단계로서 시간범위는 기원전 12~10세기이다.
제II단계는 십이대영자문화 초기 유물군과 I단계 보다 발달된 형식의 청동도자(A~D, EII, EIII, I)가 공반하는 단계로서 기원전 9~8세기 중반이다.
제III단계는 비파형동검과 청동검병 및 새로운 형식의 청동도자(EIII, F)가 공반하는 단계로서 기원전 8세기 후반~6세기 전반이다.
제IV단계는 앞의 유물 외에 옥황묘유형을 비롯한 후기북방계유물 및 새로운 형식의 청동도자(HIII) 등이 공반하는 단계로서 기원전 6세기 중반~5세기이다.
제V단계는 토착적인 성격의 유물과 戰國燕系 遺物 및 일부 지역에서 특정 형식의 청동도자(EIII, F)가 공반하는 단계로서 기원전 4~3세기이다.
단계별 공간 양상은 제I, II단계에는 요서 지역에만 배타적으로 분포하다가, 제III단계로부터 요동과 길림 중부지역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요서 이외의 지역 가운데 길림 중부지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V단계까지 청동도자의 제작이 제약되어 있는 양상을 보인다.
아울러 요동의 남부와 동부 및 길림 동부 지역에서는 청동도자가 전혀 제작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요서 지역을 청동도자의 중심 지역으로, 길림 중부 지역을 부차적인 유행 지역으로, 요동의 남부와 동부 및 길림 동부 지역을 불모지역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길림 중부 지역은 III식의 치병동도와 정공병동도가 집중적으로 유행하였다는 점에서 해당 형식의 중심 지역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가운데 III식의 치병동도는 大凌河流域의 遼西 보다는 老哈河流域(寧城, 建平 北部)과 연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