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9(숙종 15)∼1745(영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영백(永伯), 호는 약산(藥山). 정한(挺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시봉(始鳳)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상순(尙純)이며, 어머니는 광주 안씨(廣州安氏) 병조판서 후열(後說)의 딸이다.
이 해 3월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변을 아뢰고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 날 저녁 청주에서 이봉상(李鳳祥)·남정년(南廷年) 등이 적에게 살해되자 사람들은 그의 선견(先見)에 탐복하였다. 또 영조의 탕평책(蕩平策)하에서 청남(淸南) 세력의 정치적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1729년에 올린 상소에서 “무릇 탕평의 근본은 전하가 일심(一心)으로 최상의 목표를 세우는 데 있습니다. 이에서 행하는 모든 시책과 행위는 지극히 공적이어서 사사로움이 없고, 지극히 올바르므로 편벽됨이 없게 됩니다. ”라고 하면서, 남(南)·서(西)·노(老)·소(少)를 막론하고 당인(黨人) 중에서 명류(名流)로 지칭되는 인물들을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났으며, 유형원(柳馨遠)의 저서인 ≪반계수록 磻溪隨錄≫의 서문을 썼다. 저서로는 ≪약산만고 藥山漫稿≫가 있다.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장(忠章)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참고문헌≫ 國朝榜目
≪참고문헌≫ 藥山漫稿
≪참고문헌≫ 蕩平論의 展開와 政局의 變化(朴光用, 韓國史論 10, 1984)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